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이야기

강원도의 기억

by hehesse 2019. 8. 11.
728x90
반응형

오늘 새벽,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이라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려다가, 강원도의 기억이라는 소제목으로 예전 기억을 더듬어 글로 담아냈다. 그러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렇게 새로 글을 팠다.

강원도의 기억

보통 군대를 전역한 사람들을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이 군생활을 한 지역을 보고는 하품도 하지 않는다. 내지 그 지역 향해서는 볼일도 보지 않는다. 라는 말을 말이다. 나의 경우 첫번째 군생활을 강원도 고성에서 했으니, 군필자들의 아포리즘에 의하면 고성쪽은 쳐다도 보지 않아야 하는 게 맞지만, 나에게는 이곳에 관한 좋은 기억들이 많다. 군생활이 고된 만큼 상대적으로 다른 일들이 좋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도 해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은 별개여서 서로 상쇄될 수도 없고, 다른 한 쪽이 상대적으로 더 부각되지도 않는다.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이고, 나쁜 기억은 나쁜 기억이다. 그 둘은 내 속에 동시에 있지만 섞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강원도 속초의 동명항에 집결했다. 그 후 고성의 모 사단 본부로 갔고, 그 사단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숙소에서 밖으로 나오면 연병장 너머로 동해(東海)가 보이는, 그런 초현실주의적인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내가 배속된 부대로 갔다. 한참을 올라가 간성이라는 곳으로 갔고, 또 한참을 올라가 이제는 리(里) 단위로 쪼개져 세세하게 갈라지는 마을로 들어갔다. 주변은 산뿐이었다. 평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구태여 찾자면 조막만한 논이나 국도의 평평함이 전부인 그런 곳이었다.

고성에서 바라본 동해의 일출. 왼편은 화진포, 오른편은 거진항이다.

지금도 강원도를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강원도는, 강원도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험준한 산맥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뚝 솟아나 있다. 버스를 타고 지정된 부대를 가기 위해 국도를 타고 올라갔던 2013년이나, 헬기를 타고 강원도 지역의 산맥 사이를 비행하는 지금이나 결국 강원도가 강원도임을 알려주는 것은 그 압도적인 산맥이었다. 버스를 탔을 때는 한없이 올려다 봐야 했고, 헬기를 탔을 때는 부딪히지 않기 위해 한참을 올라야 했다. 고도계가 3,500ft를 가리키는 것도 내게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강원도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내게는 이곳에 관한 기분 좋은 추억이 남아 있다. 그 중 간성과 거진은 지금 돌아다봐도 내게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다. 어느정도의 현실성이 배제된 것은 내게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가 예전에 쓴 <거진은 아름답다>라는 짤막한 글과, 거기에 올려진 사진이다. 더보기에 담아 놓았다.

더보기

<거진은 아름답다>

결국은
아주 오래전 이야기가 되겠지만
거진은 아름답다. 고 과거의 풍경을
현재형으로 풀어 쓸 수 있는 것은.

매우 힘들 때 이곳을 보며 지었던 웃음과
또 누군가가 매우 힘들었을 때
여기서 나란히 밤바다를 보았을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들이
화석이 되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새벽 세시의 지갑을 잃어버린 이야기가 있고
매 저녁을 굶던 한 장교가 있고
이마가 예뻤던, 터지는 웃음과 송곳니가
그리운 소녀가 있고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일어난 그곳을
바라보는 나이를 일찍 먹은, 한 청년이 있다.


사진은 당시 GOP에서 내려다보이는 거진항을 찍은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담아 놓은 글이다. 이글을 썼을 당시는 2014년. 그러니까 한참 GOP의 3평 남짓한 벙커에서 하루종일 있었던 때의 일이다.

소중한 사람들

간성에는 내가 잘 가는 분식집의 아주머니가 계셨고, 간성터미널 1층의 사진관 아저씨가 계셨다. 도서관에 가면 이따금씩 웃음으로 맞이해줬던 사서와, 곧 그 사서와 친해져 간성에서 한번, 거진에서 한번 산바람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처음 우리가 걸었을 때, 힐을 신은 그녀를 눈치없이 걸리게 한 미안한 마음이 있다. 게다가 햇살을 피해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게 했으니, 그쪽으로 나는 참 둔해도 둔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거진에서 만났을 때는 그녀는 한결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왔다. 기억에 맞다면 편한 차림의 원피스와 신발은 '플랫 슈즈'였다. 분식집을 찾으려다 그날따라 문이 모두 닫혀서 어느 호프집에 들어갔다. 날 밝을 때의 호프집은 가정집의 부엌마냥 정겨웠다. 그곳에서 치킨을 먹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가정집 부엌'마냥 정겨웠던 이유는 호프집 특유의 어둑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장님 아들이 있었고, 사장님의 얼굴을 보니 GOP에서 우연히 만난, 신문 기자였고, 알고보니 신문기자도 하고 치킨집도 한다는 것이었는데, 결정적인 것은 뜬금없이 이 가게에 피아노가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아는 곡들을 여러번 돌려 연주하다가, 무지막지하게 많이 미스터치한 곡에 대해 내가 손을 푸는 중이었다고 너스레를 떨자, 그녀는 "아유 그럼요. 지금 손 푸시는 거잖아요. 알죠."라고 친절하게 농을 받아주었다. 그런식으로 채워지는 하루였다.

간성터미널 1층의 사진관 아저씨는 서울에서 사진을 찍으셨던 분인데, 이곳으로 왔다. 어느날 내가 사진관 문을 박차고 들어가 '모델처럼 찍어주세요!'라고 했다. 그때, 내가 그런 사진을 찍은 것은 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높거나, 정말로 내가 대단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찍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간성의 세찬 바람을 며칠이고 들으면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밤만 되면 숙소의 창문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보다 더 크게 때리는 바람 소리는 사람을 유약하게 만든다. 게다가 숙소에서 나가면 마주하는 높디높은 산들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로 가면 쌓여 있는 업무와 끝나지 않는 일들 속에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그때 나는 사진관에 들어가 '모델처럼' 찍어달라고 주문한 것이었다. 아마 사진관 아저씨는 얘 뭐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다정하게 사진을 찍어주셨다.

당시에 찍은 사진

김밥천국의 아주머니는 내게 늘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그리고 김밥 1인분을 시키면 꼭 2인분같은 1분을 주셨고, 포장해가겠다고 하면 1인분같은 1인분을 덤으로 주셨다. 자주 다니다보니 우리는 어느정도 친해졌고, GOP에 올라가는 날이 꼭 내 생일이었는데 그때 생일파티 겸 위로파티를 해주셨다. 케이크도 먹고, 막걸리도 마셨던 기억이 있다. 물론 GOP에 올라가면 이 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인상을 받아 그렇게 거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지만, 또 사람 사는 곳이라고 그곳의 생리가 분명 있다. 머리를 쓰면 언제든지 민통선 아래로 나올 수 있었다. 그전까지 만큼은 아니었지만 GOP에 올라가서도 나는 김밥천국을 꾸준히 갔고, 그때마다 아주머니는 참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그런가 하면 같은 울타리에서 군생활을 하는 선배 장교 한명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냈다. 2년 차이가 나는 선배라면 눈도 못 마주치는 게 정상인데, 나는 그의 눈을 잘만 마주쳤고 한번씩은 농담도 건네는, 그런 편한 선배였다. 당시 선배는 차가 있었다. 저녁은 늘 굶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억지로 챙겨서 같이 먹고는 했다. 어느정도였냐면 부대에서 저녁을 먹은 당일에도, 선배가 일이 늦게 끝나면 간성이나 거진에 나가 함께 밥을 먹고 돌아왔다. 나야 한번 더 먹으면 그만이지만 그 선배는 내가 안 먹으면 굶을 사람이었다. 그때, 우리는 거진항에 참 많이도 갔었다. 그가 간성에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부대 사람을 밖에서 마주치기 싫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생각인데, '드라이브 할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부대에서 간성까지는 고작 7분정도 거리였고, 거진까지는 못해도 15분에서 20분을 가야했다. 구불구불한 길과 곧게 뻗은 국도, 다시 구불구불한 해안도로가 있는 루트였지만 선배는 이 길을 참 좋아했다. 부대에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답답할 때, 꼭 나를 불러 거진항까지 갔다. 가서, 거진항의 방파제에서 보이지도 않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나와 함께 캔커피를 마셨다. 그당시 우리는 거진에 있는 대부분의 음식점은 다 가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선배가 나를 '끌고' 다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끌려' 다니기 전에 나는 항상 따라 다녔다. 선배가 거진 가자! 라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아무런 고민없이 옷을 입고 그보다 더 빨리 차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선배가 좋았고, 거진 가는 길이 좋았고, 거진이 좋았다. 돌이켜보면 그가 있었기에 군생활이 잘 흘러갔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또 그런가 하면,

마지막으로 또 그런가 하면,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으셨던 영관급 장교 분들도 나를 예뻐해주셨다. 특히 첫 연대장님의 경우, 다른 곳으로 영전하시기 전에 나를 연대 정훈과장으로 인사이동을 하고 가주셨다. 초임 장교가 상급부대에서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사단에서도 반대하며, 연대 교육장교를 대리임무 시킬 것을 권고했다는데 연대장님께서 나를 그곳으로 올려주시고 당신은 다음 보직으로 이동하신 것이다. 그러고보면 첫 연대장님과는 기분 좋은 추억이 많다. 그분이 다른 곳으로 영전하시기 전에 장교들은 식사를 했는데, 그때 나는 연대장님과 단둘이 차를 타고 갔다.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모든 일정이 끝나고 연대장실에서 사진을 한번 찍었다. 그때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시면서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다. 나 역시, 저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꺼냈다. 부대원 한명 한명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며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늘 건네주셨던 따뜻한 분이셨다. 우리의 연락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현재는 모 사단의 사단장으로 계신다.

대위 보직을 소위로 시작했다. 중위 진급식 날 두번째 연대장님께서 계급장을 달아 주셨다.

그 다음으로 오신 연대장님도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주셨다. 나는 이제 장교생활을 시작한지 고작 1년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를 많이 챙겨주셨던 기억이 난다. 어느정도였냐면, 어느날 갑자기 GOP 정찰을 가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차량에 탑승할 준비를 하기 위해 MP완장을 차고, 방탄을 쓰고 나가려는데, 차량이동이 아니라 헬기 이동이었다. 당신이 말씀하신 것은 항공정찰이었고, 며칠 전부터 인근 항공부대와 시간을 조율하여 항공정찰을 계획하신 것이었다. 군용헬기의 경우 운항계획을 짤 때, 탑승자는 미리 고지하여 승인을 받게 되어 있다. 우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더 태우거나 덜 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연대장님께서 나를 태워주시려고 나름 신경을 써주신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UH-1H라는 헬기를 타고 GOP 지역을 정찰했다. 그때 헬리콥터를 처음 탑승했고 헬기 조종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여담이지만, 그때 헬기를 조종해주셨던 조종사분이 그다음 부대로 항공학교로 오셨고, 나의 담당교관님이 되셨다. 사람의 인연이란, 정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나를 잘 챙겨주셨던 수많은 분들이 있다. 제 귀여움은 자기가 찾아 받는다는 말이 있지만, 나의 경우는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내 주변에 계셨던 분들이 나를 좋게 봐주신 덕이다. 그때 만났던 이들과의 좋은 추억은, 강원도의 산맥 아래에 내 마음의 분지로 남아 있다. 그 분지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하나 있고, 거기에는 내가 살고 있다. 첩첩산중의 산맥 속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그러한 두터운 산맥이 외려 외풍과 고난을 막아주는 따뜻한 마음의 분지인 셈이다.

728x90
반응형

'일상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그와 글쓰기에 대하여  (12) 2019.08.30
내리사랑과 치사랑에 관한 몇 가지 텍스트  (0) 2019.08.24
연애상담  (13) 2019.08.19
인천 국제공항에 대한 단상  (0) 2019.08.02
브롤스타즈에 대한 단상  (0) 2019.07.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