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한 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안부를 묻는 전화여서 이런저런 근황을 주고받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 친구가 어렵게 입을 뗐다. 만날 수 있느냐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더 있다는 것이다.
아내와 첫째가 여행을 갔던 터라, 지금 둘째를 보고 있어 시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대신 전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니 통화로 이야기 하자고 했다. 그러자 통화로는 어렵단다. 그렇다면 둘째와 함께 우리 동네 카페에서 얘기를 좀 나누자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가 듣기에는 좀.. '이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연애 문제란다. 형이랑만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아이를 재우고 밤에 이야기를 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날 셋이 만나 저녁을 해결하고 우리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오니 벌써 저녁 일곱시가 넘은 시간. 아이가 잠들 때까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그 다음에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나는 집안일을 마저 하고, 아이와 몸으로 실컷 놀아주고(그래야 일찍, 푹 잠들테니!) 드디어 아이가 체력이 방전되자 양치시키고, 샤워시키고 재우고 나간다는 게 같이 잠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밤 12시. 아뿔싸. 거실로 후다닥 나간다. 그는 책상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음악을 들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기 전에, 연애에 관한 상담자로서 내가 과연 적합한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연애한지도 오래 되어 그의 말을 잘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적절한 대답은 해줄 자신이 없었다. 원체 조언이나 충고마저도 비방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얘기를 '해주기' 보다는 얘기를 들어야지! 다짐을 하고 그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사연을 자세히 적을 수는 없지만, 그가 겪는 괴로움의 원인은 명확했다. 그는 이미 관계가 끝난 그녀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는 것. 너무 단순하지만 이것이 결국은 모든 아픔의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에 몰입이 되는 바람에 나도 너무 아파지고 괴로워졌다.
그러자, 얘기를 듣고만 있어야지. 충고는 무슨! 했던 내 다짐은 무너지고 내가 그였다면 이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이말저말을 내뱉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아주 조용하게 윽박을 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답이 오고 갔다.
"너 너무 그 사람을 좋아해!"
"네 맞죠."
"너 너무 그 사람 말을 오래 믿고 있어."
"무슨?"
"그때 그 사람이 했던 말 말야."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때의 그 말은, 그때에만 유효한 거야."
"그럼 그 사람이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건가요?"
"아니지. 그 사람은 그때의 진심을 얘기한 거야. 그리고 지금은 그때가 아니여서, 그때의 진심이 진심이 아닌거야. 그 사람이 거짓말 한 건 아니고."
"어렵네요."
"그리고 너가 너무 그사람을 좋아해서, 오래도록 그 말이 진심으로 믿어진 거야. 믿기를 바랐던 걸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동생의 항변과, 또 나름의 생각과, 또 여러 이야기가 오고가다가 다시 이런 대화로 우리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너도, 나도 똑같은데. 너는 그 사람을. 좋아했다기 보다는, 너가 좋아하는. 그 사람을 좋아했던 거야."
"더 어렵네요."
"그렇지만 사실인 걸. 너나 나나 그사람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 다만, 우리는 늘 우리가 좋아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그에게 해 준 두 대답 때문에 나는 어딘가 쓸쓸해졌는데, 차라리 그 편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두 가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밀려오는 쓸쓸함보다는, 저 두가지를 받아들여 생기는 쓸쓸함이 훨씬 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든 말을 하고 난 후에 밀려오는 헛헛함과 부끄러움. 기실 연애에 대한 감정이라면 현재진행형인, 과거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래 어쩌면 현재완료형인 연애를 하는 그가 더 잘 알면 알지 않겠는가. 대답한 것과 그 내용이 어딘지 멋쩍어지는데 그는 외려 얘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웃어보인다.
그날 우리는 어두운 새벽 내내 여러 음악들을 들었다. 둘 모두 다음날 일정이 있어 술 한잔을 안 마셨지만 지독하게 취했다. 그래도 우리가 한 공간에서 나란히 얘기를 하니 쓸쓸함은 곧 가신 기분이었다. 각자의 개인사에서 피할 수 없는 연애의 슬픔과는 별개로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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