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내리사랑은 있지만 치사랑은 없다, 한다. 치사랑이라는 단어 역시, 내리사랑의 반대 개념으로 만들어진 단어라는 거다. 얼핏 보면 맞는 말인 듯 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낙수(落水)처럼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랑은 방향이다. 방향은 위 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사랑의 방법이 다를 뿐이다.
어린시절, 뻐꾸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미새가 아이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장면을 두고 내리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기새가 어미를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치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몰랐지만,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인 것이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에 대한 몇 가지의 텍스트를 찾아 달아 놓는다.
내리사랑, 안도현 <스며드는 것>
다음은 안도현 시인의 시 <스며드는 것>의 전문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부모의 역할은 자식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때는 절망적인 상황을, 잠시 희망으로 가려주는 지식도 필요하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포로수용소에 같인 두 부자(父子)를 보라. 아비는 끊임없이 자식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열악한 상황에서 그 어린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희망 보여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적 상황에서 어미게는 체념을 가르치기 보다는, 마지막까지 알들에게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지속되는 일상이 곧 희망이니, 푹 잠들게 하는 것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그리고 대피할 수도 없는 3등석 승객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어미는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깊은 잠을 재운다. 때로는 불가피한 절망 속에서는, 그러한 희망으로 절망 가리기가 필요한 것이다.
치사랑 하나, 이루리 <북극곰 코다 호>
<북극곰 코다 호>라는 동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사냥꾼 보바는 북극곰을 사냥하기 위해 이리저리 헤맨다. 그러다 발견한다. 어미 북극곰과 아기 곰을. 보바는 총으로 곰을 조준한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내린다. 그래서 보바는 북극곰의 검은색 코를 찾는다. 곰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검은색 코만 찾으면 얼마든지 북극곰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준경에 검은코가 들어온다. 그때, 갑자기 검은코가 사라진다.
아기곰이 엄마곰의 코를 손으로 가려준 것이다.
아이는 능력껏 어미를 보호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백색 설원에 붉은 피를 보지 않고, 새하얌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가 해준 것이라고는 그저 몸에서 정 반대의 색깔을 가진 검은 코를 가려준 것 뿐이다. 이 얼마나 사소하고도 위대한 치사랑일까.
치사랑 둘, 기형도 <엄마 걱정>
아이로써 어미에 대한 사랑은 그 얼마나 허약하고 다채롭나. 아이는 오래도록 엄마를 기다리며 오로지 엄마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외로움과 기다림은, 아이가 어미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다음은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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