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고등학교 친구 범수를 만났다.

 

점심 무렵, 청계천 트리에서 만나 교보 방면으로 이동했다. 일민미술관 1층의 <카페 이마>에 들어섰다가, 사람들이 꽤 있어 다시 나왔다. 곧 광화문 우체국 옆의 <스타벅스>에 들어섰다. 우리는 음료를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2년 전 어느 날 광화문 교보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마주쳤으니 8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때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또 2년이 흘렀다.

 

범수는 내게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시간에 좀 강해. 공간보다는. 공간에 약하다는 건 아니고. 너를 그때 만난 건 2017년 7월이었어.' 시간이라는 단어에 미소가 지어졌다. 시간은 내 관심분야다. 오래 전부터 관심 있었지만, '관심분야'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에 강하'다니. 그런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니 범수가 말한다. 자기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데 내 앞이어서 그런지 그런 표현이 나왔다고.

 

2017년 7월. 어느덧 2년 2개월이 지나가버렸고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질, 페르소나, 연애,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날들, 결혼 등에 관한 이야기. 내 결혼이 자못 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었나보다. 정상적인 범주 내의 결혼도 아니었고, 때도 일렀다. 내 결혼 소식을 들은 것이 훈련소에서라고 하니, 어쩌면 그 비현실감과 거리감은 더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공간에서, 다른 공간의 삶을 전해 들을 때 당혹스러워한다. 더구나 같은 시간이라면 더더욱.

 

스타벅스에서 나와 광화문 교보로, 광화문 교보에서 서소문으로 향한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한때 그가 공부했고, 돌아다녔던 공원은 어느덧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새로이 바뀐 공간에 대해 그는 여러 생각에 잠긴 듯하다. 우리는 또다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라고는 범수와 호겸, 승준과 지호가 다다. 지호는 기숙사 생활을 했을 때의 친구였고, 나머지 셋은 새로 전학간 곳에서 만난 친구다. 호겸과 승준은 같은 이과였기 때문에 2년간 붙어살다시피 했고 범수는 문과였기 때문에 우리는 겹치는 시공간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까지 연락이 닿고, 또 만나서 이야기하게 된 것일까?

 

그에게 어떤 동의가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고등학교 내내 그가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이과에는 내가 있고, 문과에는 그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우선 샤프하고 지적으로 생긴 그의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아이가 대개 그렇듯, 호감이 가고 호기심이 들수록 먼저 말 걸기가 주저된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수줍음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와 함께 서오릉에 간 적이 있었다. 백일장 대회에 같이 나간 것. 그때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여태껏 마주치고 스쳐간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을, 한 공간에 같이 있었다.

 

그것이 연이 되었던 걸까.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종종 근황을 묻고 답하며, 만나기까지 하며 그 관계가 유지되오고 있는 것. 그나 나나 모두 백일장에서 인연이 깊어진 탓일까.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로가 쓴 글을 본다. 나는 당시 문학에 '꽂혔었고' 그 후로 그와 관련된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시사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고, 글에 관한 한 프로페셔널한 직업을 가졌다. 어렵다던 언론고시를 패스해 그는 오래도록 기자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기사들을, 그리고 이따금 화면에서 비치는 그의 모습과 육성을 볼 때마다 나는 멀리서 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는 했었다.

 

그도 나도, 다시 글을 쓰는 자리로 돌아간다. 그도 글을 쓰고 있을 것이고, 나 역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우리는 또 서로의 글을 볼 것이고, 또 서로 만날 것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이렇듯 이따금씩 만나는 만남에 나는 늘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렇게 하루치의 행복을 또 보장받는 것이다.


범수와 나
나도 너처럼 안경 벗고 다시 찍자! 해서.
우리가 마신 음료. 범수는 연유가 들어간, 나는 카페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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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에카 2019.09.15 13:09 신고

    계속 꾸준히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건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죠~

  2. 잉여토기 2019.09.15 22:49 신고

    글쓰기라는 공통점 역시 공유할 수 있어 반가움과 공감대가 더욱 더해졌을 듯해요.

 

 

고도의 종류(1/3) 지시고도, 절대고도, 진고도

공중에 뜨는 비행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장치가 있다. 바로 고도계다. 고도계는 현재 내가 얼마나 높이 떠 있는지를 알려주는 동시에, 관제기관으로 하여금 다른 항공기와 부딪히지 않도록 하는 고도의 정보를 제..

elrelojsintiempo.tistory.com

 

저번 글에서는 지시고도, 절대고도, 진고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기압고도와 밀도고도를 다룬다. 이 둘을 하나로 묶은 데에는 둘의 연관성이 크기 때문이고, 둘 모두 조금 특이한 고도이기 때문이다. 기압고도와 밀도고도는 고도이긴 고도이다. 하지만, 동시에 고도는 아니다.

 

무슨 말일까? 고도이긴 고도이지만, 고도가 아니다. 라는 것은. 다음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면 기압고도는 가상의 고도이고, 밀도고도는 항공기의 성능을 따지는 지표로, 이름만 '고도'이지, '높이'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가상의 고도, 기압고도

 

기압고도란, 간단히 말해 고도계의 콜스만창을 29.92로 맞추었을 때 지시하는 고도를 말한다. 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해수면의 대기압을 29.92inHg이라고 가정하고 맞추는 고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29.92인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표준대기압에 대해서 살펴봐야 한다. 대기압이란, 공기의 무게를 뜻한다. 지표면에 가까울수록 중력은 공기를 더 많이 붙잡아 두는데 이 때문에 지표면 가까울수록 공기의 무게, 즉 대기압은 높아진다. 따라서 기체의 압력과 밀도를 비교할 경우에는 표준대기압을 이용하게 되는데, 표준대기압이 바로 inHg로 환산하였을 때 29.92inHg를 뜻한다.

 

고도계는 그 내부에 29.92inHg에 고정되어 있는 아네로이드가 장착되어 있다. 만일 주변 기압이 높으면 아네로이드는 팽창되고, 이와 연결된 지침이 더 낮은 고도를 가리키게 되어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주변 기압이 29.92inHg보다 낮다면 아네로이드는 수축하여 지침은 더 높은 고도를 가리키게 된다.

 

29.92inHg로 고정 세팅 후 밀봉되어 있는 아네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지침과 연결되어 있다.

 

주변 기압이 29.92inHg보다 낮으면 아네로이드는 팽창하며 지침이 높은 고도를 가리키게 된다.
주변의 기압이 29.92inHg보다 높으면 아네로이드를 수축시켜 지침이 낮은 고도를 가리키게 된다.

출처: Altimetry basic principles 유튜브 클립(클릭시 이동)

 

우리는 앞서 '지시고도'라는 것을 다뤘다. 지시고도란 인근 공항이나 비행장에서 불러주는 고도계 수정치 값을 고도계에 세팅했을 때의 고도이다. 그렇다면 왜 관제사는 고도계 수정치 값을 불러주는 것일까? 현재 해수면(0ft)의 기압을 알고, 거기에 맞게 설정해주어야 제대로 된 고도 측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수면에서의 기압은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고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해수면에서의 기압값을 알아야 한다.

 

즉 지시고도는 이런 식이다.

 

"여기 지역 해수면의 기압값, 즉 0ft에서의 기압값은 29.99inHg야. 그러니, 콜스만창에 이 고도계 수정치 값을 세팅해야해. 왜냐하면 지금 네 고도계의 아네로이드는 29.92inHg에 맞춰져 있지 않니? 어서 세팅해서 실제 높이를 지시하도록 해!" (물론, 그래봤자 크게 차이는 나지 않는다. 0ft에서 10,000ft 까지는 1,000ft 증가할 때마다 1inHg씩 일정한 비율로 감소하기 때문에, 0.07inHg라고 해봤자 70ft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압고도는 어떨까? 

 

기압고도는 실제 해수면의 기압과 관련 없이 가상의 표준해수면(무조건 기압이 29.92inHg가 되는 곳을 0ft라고 가정!)을 설정하여 기압을 고도로 나타낸 것이다.

 

즉 기압고도는 이런 식이다.

 

"너가 있는 곳의 실제 해수면 기압값은 크게 신경 쓰지마. 콜스만 창을 29.92inHg로 맞춰. 맞췄어? 그래! 이제 맞췄으니까, 너가 있는 곳의 해수면 기압값은 29.92 인거다? 그러니까 표준해수면이네."

 

따라서 기압고도를 세팅하게 될 경우, 표준해수면은 실제 해수면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일 실제 해수면의 기압값이 표준대기압인 29.92inHg보다 높은 지역이라면 표준해수면은 위에 설정되고, 반대의 경우라면 아래에 설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압고도는 왜 필요할까? 전이고도(미국의 경우 18,000ft이고 한국과 일본은 14,000ft)를 기준으로 전이고도 아래에서는 지시고도를, 전이고도 위에서는 기압고도를 사용한다. 지시고도의 경우 제대로 된 고도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 지역이 달라질 때마다 계속해서 고도계를 수정해야 하는 소요가 발생하고, 여러 항공기를 관제하는 관제사의 입장에서도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전이고도보다 높은 고도에서는 기압고도로 세팅하여, 모든 항공기들의 고도계를 통일시켜 고도에 오차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항공기의 성능 지표, 밀도고도 

 

밀도고도는 이러한 기압고도에 온도의 변화를 반영한 고도를 뜻한다. 밀도고도는 실제 높이를 뜻하는 고도가 아니다. 항공기의 성능 지표로서 활용되는 수치로 고도와 무관하다. 그렇다면 왜 '밀도'고도인 것일까? 항공기의 성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공기의 양이다. 즉 공기의 밀도가 항공기 성능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밀도고도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우선, 엔진을 사용하는 항공기의 경우, 유입되는 공기의 양이 굉장히 중요하다. 엔진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요소(연료, 불꽃, 산소)가 필요한데 공기밀도도 이와 큰 연관이 있다. 또한 항공기의 에어포일에 작용하는 공기의 양에 따라 양력의 차이가 난다. 고정익이라면 프로펠러나 날개가, 회전익이라면 메인 로터 블레이드의 에어포일이 그 대상이 되겠다. 공기의 양이 줄어들면 들수록 에어포일의 위아래로 작용하는 공기의 절대적인 양이 줄어들게 되어 양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즉, 공기의 양이 줄어든다면! 항공기의 성능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공기의 양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공기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것.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공기 밀도 ↓ = 항공기의 성능 ↓

 

그렇다면 공기의 밀도는 언제 떨어질까? 공기의 밀도가 떨어지는 요인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볼 수 있다. 첫째, 높이이다. 고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대기에 있는 공기의 분자량은 줄어들고, 따라서 공기의 밀도는 떨어진다. 둘째, 온도이다. 온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부피는 팽창하기 때문에 공기의 밀도는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습도이다. 습도가 높을수록 공기의 밀도는 줄어든다.(아보가드로의 법칙에 의하면 모든 기체는 같은 온도와 압력에서 같은 부피 속에 같은 수의 분자가 존재한다. 공기의 분자량은 29.2g / 수증기의 분자량은 18.02g으로서, 대기 중에 수증기가 많이 함유되면 될수록 단위 부피당 질량이 줄어들어, 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도 ↑, 온도 ↑, 습도 =  공기 밀도 ↓ = 항공기의 성능 ↓

 

그리고 공기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곧 밀도고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밀도고도표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다음의 표를 보자.

 

density altitude chart, 출처: 위키피디아

만일 기압고도가 3,000ft 온도가 10℃ 라고 해보자. x축이 온도, y축이 기압고도, 사선이 밀도고도이기 때문에 두 부분이 만나는 점을 따라 가보면, 대략 밀도고도가 4,000ft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온도를 한번 높여보자! 같은 조건에서 온도가 25℃가 되었을 때 밀도고도는 5,000ft가 됨을 알 수 있다. 만일 고도를 높인다고 해도 밀도고도는 기존보다 더 높아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밀도가 높을 때마다 밀도고도는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식을 세울 수 있겠다.

 

고도 ↑, 온도 ↑, 습도 = 공기 밀도 ↓ = 

밀도고도 = 항공기의 성능 ↓

 


기압고도와 밀도고도는 상당히 연관성이 많은 고도이다. 회전익의 경우 전이고도까지 올라가 비행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압고도와 밀도고도를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고정익의 경우 전이고도 이상에서 비행을 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반드시 알아둬야 하는 부분이다. 다음의 글에서는 이러한 고도 개념을 바탕으로 어떻게 고도계를 세팅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대표적인 세 가지 방법으로 QNH, QFE, QNE가 있다.

  1. I부자아빠I 2019.09.14 08:50 신고

    고도의 종류가 다양하네요..헷갈리기두합니다~^^

    • he_hesse 2019.09.14 18:57 신고

      정말 다양하죠! 저도 많이 헷갈립니다 ㅎㅎ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2. 휴식같은 친구 2019.09.14 10:12 신고

    고도에 대한 이야기군요.
    덕분에 고도에 대해서 조금 배우고 가네요.

    • he_hesse 2019.09.14 18:58 신고

      감사합니다^^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늘은 따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산책이 좋아

여운에 잠겨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선물받은 연필을 어둠속에서 밝혀 보다가,

작은 프로젝트를 하나 준비합니다.

 

<별자리 0912>

 

안국동에서 명륜동까지,

별자리의 길이는 총 11.9km

 

별자리의 지도를 남깁니다.

 

인터넷 지도를 총 14장 캡처하여,

서로 붙여 거대한 한 장을 만들고

걸었던 길들을 선(線)으로 남겨봅니다.

 

이 지도 위에 기억에 남는 곳들을 별[星] 삼아 표시 합니다.

 

이 별자리에는 여러 걸음과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별자리 0912> 지도

 

1단계, 축소하여 한장으로 단순하게 만들기에는 걸었던 골목들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하여, 세세하게 골목이 나와있는 확대된 지도들을 총 14장 캡처하여 이어 붙입니다.

 

2단계, 걸었던 구간들을 표시합니다. 구간들마다 골목의 느낌이 달라 색깔별로 구분하여 표시하였습니다.

 

3단계, 이어붙인 지도를 지우고 길들만 남겨 놓습니다.
완성본, 길에서 만난 별들을 표시합니다. 하나의 별자리가 됩니다.

<별자리 0912> 포스터

 

산책의 시작점부터 끝까지,

걸었던 구간별로 색을 구분하여 포스터를 만들어 봅니다.

(실력은 조악하지만.. 그래도!)

 

이날의 산책에 관해서는 일기장에 먼저 적고,

훗날 블로그에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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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휴식같은 친구 2019.09.13 09:24 신고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 he_hesse 2019.09.13 17:11 신고

      감사합니다^^ 휴식같은 친구님도 한가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단상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일정 기간을 지방에 있는 기숙사 학교에서 보냈다.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생활을 하며 지내는 학교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장에 모여, 호실별로 인원체크를 하고 체조를 한다. 그렇게 아침 점호가 끝나면 남은 시간 동안은 교실에 가서 공부를 하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부족한 잠을 자든, 아니면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는다. 저녁도 마찬가지여서 기숙사 사감이 주관하거나, 2학년 자치부 학생들이 주관해서 방의 정리상태를 확인하고, 아침보다 더 힘들게 저녁 점호를 하고 하루를 닫는다.

 

<원강채, 기숙사의 하루> 제본 표지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소설 <원강채, 기숙사의 하루>에 상세히 담아놓았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솔제니친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호겸으로부터 이 소설을 소개 받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기숙사 생활에 대해 이 소설의 형식으로 글을 써야지 마음 먹었다가 대학교 2학년, 스페인에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소설, <원강채, 기숙사의 하루>

 

친구 호겸뿐 아니라 사야카의 도움도 컸다. 스페인에서 인천으로 들어오기 위해 나는 산티아고에서 프랑스 파리로, 파리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두 항공권 사이에 하루가 붕 뜨는 바람에 파리에서 1박을 해야 하는 상황. 고민 끝에 샤를드골 공항 터미널의 노보텔에서 1박을 했는데 그때 우연히 사야카와 만나게 되었다. 예정에 없는 파리 시내 구경도 하고, 이틀동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당시, 이 소설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야카는 내게 얘기했다. 언젠가 소설이 완성되면 꼭 보여달라고.

 

<원강채, 기숙사의 하루> 제본 두번째 장. 사야카와 한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이렇게, 호겸과 사야카 덕에 나는 힘주어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설을 제대로 쓰기 위해 당시 다녔던 학교를 두번 방문했다. 학교 건물의 위치와 간격, 학교를 둘러싼 산과 그 산길들에 대해 꼭 알아야 했다. 최초에는 단편으로 탈고를 했다가 곧 에피소드를 붙여 원고지 455매의 중편 소설이 탄생했다. 소설의 첫 장면은 주인공 원강채가 기숙사에서의 아침을 맞이하는 내용. 그때 흘러나온 노래가 바로 클래지콰이의 <Salesman>이다.

 

<원강채, 기숙사의 하루> 첫 장면. 클래지콰이의 노래로 시작한다.

실제로 이 곡은 내가 기숙사생활을 했을 때 아침 기상벨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차가운 새벽 공기, 위험한 구조물을 지나 운동장으로 걸어내려 갔던 모습, 아침 점호가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던 아이들. 좋아했던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걷거나, 먼저 운동장에 도착한 날이면 그 친구가 오기까지 아이들 사이를 훔쳐보았던 기억들.

 

클래지콰이 프로젝트, Salesman

 

우리가 흔히 클래지콰이라 부르지만 풀네임은 클래지콰이 프로젝트이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그룹은 DJ클래지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2001년 캐나다에서 일을 하며 인터넷에 올린 음악들이 인기를 얻게 되었고, 곧 플럭서스와 계약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정식 앨범으로 데뷔한 것은 2004년으로, 일렉트로니컬한 클래지콰이의 노래들이 대중성도 겸비하여 첫 앨범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Salesman>은 2집 앨범 《Color Your Soul》에 수록된 곡으로 2005년 9월에 발매되었다. 이 노래를 듣기까지 나는 호란과 같은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잘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지만, 한마디로 듣기가 너무 편했다. 그리고 뭐랄까. 호흡과 발음 등이 모두 자연스러웠달까.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듣는 곡인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 노래는 내가 서울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올 때까지, 한번을 바뀌지 않고 기상벨로 계속 쓰였다.

 

노래와 가사

 

 

hey I hope you know

I want certain words

 

hey, can you take my soul

I am going nowhere

 

why do people live

I want certain words

 

can I take your soul

I am going nowhere

 

yesterday you called me

today you left me

 

My heart is frozen like an ice

"I am going nowhere"

 

what's up you people my vision's not clear

 

there is a hole in my heart

 

Hey you understand?

I want certain words

 

can you take my soul

I am going nowhere

 

why do people know

I want certain words

 

can I take your soul

I am going nowhere

 

yesterday you showed me.

today you erase me.

 

My heart is beating like a drum

 

"I am Mr.Salesman" what's up my story

 

how to be my self

 

there is a hole in my b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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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ngdante 2019.09.12 07:57 신고

    소설 기숙사의 하루가
    웬지 흥미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추석명절을 여유롭게 보내세요.. ^^

    • he_hesse 2019.09.12 20:06 신고

      감사합니다. 제가 겪었던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네요^^. kangdante님도 추석 명절 잘 보내셔요~^^

  2. I부자아빠I 2019.09.12 09:43 신고

    노래정말많이들었었는데 지금도활동하는지모르겠네요!

    • he_hesse 2019.09.12 20:09 신고

      요즘은 조금 뜸한 것 같아요! 그래도 예전 노래는 여전히 좋네요^^ 부자아빠님 추석 잘 보내셔요~

  3. 휴식같은 친구 2019.09.12 10:23 신고

    고등학교때 덕분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겠네요.
    기숙사 생활도 재밌긴 하죠.
    처음들어보는데 좋네요.

    • he_hesse 2019.09.12 20:10 신고

      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했답니다. 기숙사 생활 그 나름대로 재미와 애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휴 즐겁게 보내셔요~!

  4. 겨울빗소리 2019.09.13 17:16 신고

    와우 기숙사의 하루라니 기대되는 소설입니다^^

    • he_hesse 2019.09.13 17:22 신고

      그때는 참 벗어나고 싶었던 곳인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곳만의 추억이 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은 소중해지는.. 추석 잘 보내고 계신지요!

예전에 경복궁 야간개장에 관한 글을 썼었다. 그리고 사진을 첨부하려는데 계속 오류가 나서 모두 첨부하지 못했다. 이번에 올릴 사진들은 2년전 여름,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경복궁의 모습. 그때 다 올리지 못한 사진들과 동영상을 하나 첨부했다. 동영상은 근정전의 모습과 멘트를 함께 남긴 영상. 이전에 남긴 글은 다음에 링크를 달아둔다.

 

서울 밤산책, 경복궁 야간개장

 

서울 밤산책, 경복궁 야간개장

조선의 정궁, 경복궁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중심에 있는 경복궁은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이다. 사적 1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행정구역상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161에 위치해 있다. 경복궁은 철저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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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경복궁, 사진과 영상

 

경복궁 가는 길.

 

초점이 나간, 경복궁 근정문의 모습

 

도심 방향을 바라보며.

비에 젖었기 때문일까. 수면에 반사된 불빛들에 주변이 더욱 밝다.

 

근정전의 모습.

캐논 DSLR로 촬영

 

근정전의 모습을 담은 영상

 

근정전 동측 행각에서.

이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이 밤에 어떻게 변하는지를.

나무의 결, 그 틈 사이로 어둠이 번진다.

이때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다.

불길처럼 퍼지는 누룩이다.

 

근정전 내부 모습

어둑한 가운데, 모든 것들이 가지런하다.

그 가지런함과 적요로움을 나는 좋아한다.

 

처마선.

달 없는 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은 구름으로 막혀 있어

순도 100퍼센트에 가까운 어둠이었다.

처마 아래는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은 우주 같았고, 처마는 지구 같았다.

 

....통..

 

담벼락의 조명들이지만,

내게는 <토끼와 거북이>에서 뒤늦게 달려가는

토끼의 달음질 같다.

 

밝은 조명 하나

 

떨어져,

 

있는 듯 하지만,

 

실은 하나

 

아미산의 모습.

이곳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경회루의 1층 모습

조선시대였다면, 비내리는 가운데에도 연회가 계속 되었을.

 

경회루의 모습

 

담벼락을 따라 나 있는 조명들.

담이 울타리와 같이 공간을 둘러싼 구조물이라면

이 조명들은 공간을 동여맨 끝 같다.

 

강대강

빛이 소리라면,

강력한 폭발음과

강렬한 잔향.

 

2019 경복궁 야간개장

 

이전 글에 달아놓았던 올해 야간개장 정보를 간략히 담는다. 올해 경복궁 야간개장 기간은 4월 27일 토요일부터 시작되어 10월 31일 목요일까지 진행된다. 요금은 일반인과 외국인, 만 65세 이상 어르신 모두 3,000원으로 동일하다. 한복 착용자는 무료이다.

 

화창한 날의 밤산책도 좋지만, 이렇게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의 밤산책이 더 좋다. 조명들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반사되고, 투영되어 여느 밤보다 더 밝고 희불그레해진다. 경복궁 야간개장도 만일 가게 된다면 촉촉하게 지면이 젖은 밤이 더 운치있지 않을까.

 

 

  1. I부자아빠I 2019.09.11 07:55 신고

    멋지네요 근교에 이런고궁이 있다는것도~~~^^ 부럽습니다. 즐거운 연휴보내세요!!

    • he_hesse 2019.09.11 13:16 신고

      저는 거리는 가까운데 시간이 나지 않아 못 가고 있습니다. 다음에 시간 날 때 다시 한번 가보려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2. 후미카와 2019.09.11 13:58 신고

    초점이 나간 사진도 환상적인데요. 빛을 잘 조절해서 멋진 사진을 찍으신듯.. 엄청난 솜씨에 놀랍니다. ^^d

    • he_hesse 2019.09.11 22:52 신고

      방문, 댓글 감사합니다^^ 특히 초점 나간 사진은, 사진이 운 좋게 멋지게 나온 것 같습니다!

2000년, 바야흐로 새 천년이 시작했던 새해, 그해가 저물 무렵 영화 한편이 개봉했다. 비록 12,000여 명의 관객밖에 동원하지 못했지만 나는 믿는다. 그해, 느지막이 영화관 의자에 앉아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던 1만 2천명의 가슴에는 기습처럼 먼지 같은 것이 들어찼고, 지금까지 빠지고 있지 않다고. 그 먼지란, 습기를 머금고 있어 이유없이 우리의 마음에 어떤 물기같은 것을 늘 느끼게 한다고. 영화 <화양연화>에 대한 이야기다.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영화 <화양연화>는 제 53회 칸 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주연으로 분한 양조위도, 당해, 해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므로 감독에게나 배우에게 모두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양조위와 호흡을 맞춘 장만옥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파격을 보여주었는데 그녀가 입은 치파오의 옷맵시는 정제되어 있으면서 관능적이었다.  치파오를 입은 그녀는 제 59회 칸 영화제 포스터에 등장하기도 했다.

 

영화 <화양연화> 포스터
제 59회 칸 영화제 포스터

서로 같은 상처를 가진 두 남녀

 

영화의 배경은 1962년 홍콩. 같은 날, 같은 건물로 두 부부가 이사오게 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중 한명은,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는 차우(양조위 분), 다른 한명이 무역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수리첸(장만옥 분)이다. 시간이 흐르고 이 둘은 자신의 배우자들이 서로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감각해진 일상 속에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둘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스치며 지나가고,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 첫 만남을 기점으로 만남은 점점 깊어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 만남의 빈도와 농도가 짙어졌다. 결국 그 둘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단순한 끌림으로 시작된 사랑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 둘은 유희나 쾌락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위로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의 본질은 치유였다.

 

 

다독여주기, 얼러주기, 토닥거리기, 어루만지기, 쓰다듬어주기, 무작정 들어주기, 편들어주기, 이해해주기, 아니 기꺼이 이해하기, 아니 이해하게 되기, 눈치 안보기, 자연스럽기, 수긍하기, 받아들이기, 들이 그들을 이루는 만남의 전부. 그러자, 그 둘의 삶에는 조금이나마 활력이 생기게 된다. 차우는 자질이 없어 쓰기를 멈추었던 무협 소설을 쓰게 되고, 수리첸은 그 글을 읽어주므로서, 영화는 그들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사와 같은 장면이 아닌, 쓰기-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내밀한 속내를 관객들에게도 비밀로 부치며 관객과의 거리를 넓히고, 그들의 관계가 더욱 농밀해졌다는 것을 은연중에 비추는 것이다.

 

같은 상처를 가진 두 남녀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이나마 치유가 된다. 하지만 계속 만날 수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있었고, 정작 가정을 버리고 새 출발을 하기에는 시대적으로도 어려웠다. 둘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서로 갈길을 가게 된다.(비록 한 줄로 갈음했지만, 이들의 이별은 녹록지 않았다. 이별하기까지 준비를 했고, 실천에 옮겼지만, 그 후에도 그들은 한동안 과거를 힐끗거렸기 때문이다.)

 

모든 이별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이 첫번째 예의이다.

 

영화에는 세번의 이별이 나온다. 연습으로서의 이별과 실전으로서의 이별. 그리고 이별한 후에 이 모든 상황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이별까지. 남녀간의 만남에 있어 이별은 늘 어렵다. 더욱이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제로 작용할 경우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에는 준비가 필요하고, 예행연습이 필요하다.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인내, 받아들임 역시 필요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사람이기 이전에 약(藥)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산소였다면 좋았을 것. 범상한 연인들이 떠들어대듯,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산소같은 존재였다면, 그랬다면 이별하는 즉시 숨은 멎으므로, 고통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에게 약이었다. 약이 끊어진다 하여 곧바로 죽지 않는다. 그저, 고통에 허우적거릴 뿐이다. 고통으로 점철된 날들을 앓다가 정말 죽거나,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산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약을 끊을 때 차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약의 양을 점차 줄이는 테이퍼링(tapering)이 필수인 것처럼. 이 둘은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러나 끝끝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별 앞에서 예행연습을 한다.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이별연습이 있었기에 고통을 어느정도 줄어들었으리라. 그러한 이별연습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첫번째 예의이다.

 

그렇다면 두번째 예의는 무엇인가. 약(藥) 없이 자립할 수 있는 홀로서기다. 당신으로 인해, 삶을 버텨왔으니. 당신없이도 잘 헤쳐 나가겠다는 전언. 다짐, 그리고 실천이야말로, 한때는 내 곁에 있어주었던 그이에 대한 예의이다. 이 예의까지 잘 지켜졌을 때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별을 했다고. 다시 말해 이별 후에는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 두번째 예의이다.

 

지나간 자리에, 그이가 없다 하더라도

 

두 번의 이별 끝에, 그들은 과연 이별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돌아다보고 그리워한다. 아직까지 그들은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대로 말하면 아직 과거에 얽매여 있고, 다르게 말하면 과거로부터 나오는 중이다. 아직 홀로서기를 못한 것이다.

 

 

르누아르가 말했다. 고통은 지나간다, 아름다움은 남는다.(La douleur passe, la beauté reste). 나는 그의 경구를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아름다움은 지나간다, 아무것도 안 남는다. 굳이 무엇이 남느냐고 한다면 '아무것도안'이라고 하겠다. 오디세우스가 키클로프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안(Nobody)'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그리하여 오디세우스에게 눈을 찔린 키클로프스가 주변 동료들에게 '나를 공격한 것은 아무도안이야!(Nobody is killing me)'라고 말해 동료들로부터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아무 도움을 못받았던 것처럼, 나는 무엇인가 남는다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언어유희도 아닌, 진지하게, '아무것도안'이 남는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 남지만 '아무것도안'이 남는다.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그이는 떠났으니. 하지만 만났던 시공간과 나눴던 이야기들은 남아 있다. 그 아름답고도 소중한 것이 바로 '아무것도안'이다. 그러니, 그제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름다움은 지나갔고, '아무것도안'이 남았고, 그러므로 고통도 지나갔다고. 다시 말해 홀로 설 수 있다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 그리고 마지막 장면

 

실전으로서의 이별 후, 그들은 자신의 과거들을 흘깃했다. 아직, 그들은 이별한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이별을 앞두고 있다. 그 이별이란, 이별 후에 결국은 더 이상 과거를 돌아다보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이 자막은 의역이다.

나는 투박한, 직역이 오히려 좋다.

 

那些消逝了的歲月,

彷佛隔著一塊

사라진 세월들, 마치 하나의 벽과 같다.

 

積著灰塵的玻璃, 看得到, 抓不著.

먼지가 쌓인 유리창처럼 (건너편을)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他一直在懷念著過去的一切

그는 줄곧 과거의 모든 것들을 그리워해왔다.

 

如果他能衝破

那塊積著灰塵的玻璃

만약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깨뜨릴 수 있다면

 

他會走回早已消逝的歲月

그는 사라진 세월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那些消逝了的歲月

彷佛隔著一塊

積著灰塵的玻璃

看得到, 抓不著

他一直在懷念著過去的一切

如果他能衝破

那塊積著灰塵的玻璃

他會走回早已消逝的歲月

 

사라진 세월들은 마치 하나의 벽과 같다.

 

먼지가 낀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그는 줄곧 과거의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만약 먼지 낀 유리창을 깨뜨릴 수 있다면,

 

그는 사라진 세월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1. I부자아빠I 2019.09.10 08:10 신고

    멋진글 매번 감사합니다~^^

    • he_hesse 2019.09.10 14:11 신고

      앗 감사합니다^^ 매번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더 감사드립니다!

  2. 겨울빗소리 2019.09.10 21:38 신고

    나이를 먹어도 이별은 익숙하지 못하고 늘 어려운것 같아요
    중경삼림을 보고 양조위에 반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화양연화는 너무 어릴적봐서 잘 이해하지 못했던것 같아요
    이렇게 다시 보니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네요

    • he_hesse 2019.09.11 07:31 신고

      다음에 시간되실 때 화양연화도 한번 봐보셔요. 어린 시절과는 또 다른 느낌, 생각이 들 거예요. 그나저나 양조위 눈빛. 정말 깊고 멋져요. 저는 중경삼림때는 눈빛보다는 싱그러움에 반했었고 눈빛에 반한 건 영화 색,계에서 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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