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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

만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일원

by hehesse 2019.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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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국현에서 만나 전시를 보고 헤어졌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쓴다.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하루에 내가 무엇인가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고, 무엇인가를 남긴다는 것은 나를 확인, 재확인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삶과 별개로 기록을 남기는 삶. 후자는 쉼표에 가깝다. 모든 문장부호는 질량이 없다지만 나는 이 쉼표에 크나큰 질량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직접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치열(熾熱)이라면, 이러한 삶을 되돌아보고 기록에 남기는 삶은 치열(治熱)이다. 치열한 삶과 이를 치열하는 삶. 그 냉각의 역할을 해주는 쉼표 속에 나는 최대한 많은 것을, 정직하게 남기려고 노력한다.

 

글을 쓰고, 머리를 식힐 겸 책을 읽는다. 예전에 읽은 <데미안>을 펼쳐지는 대로 발췌독 하고, 기계비평가 이영준이 쓴 <우주 감각 : NASA 57년의 이미지들>을 읽는다. 이영준을 알게 된 것은 예전, 서촌의 어느 갤러리 위에 위치한 서점이었다. 당시 나는 기계비평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사람보다 기계를 좋아하는 이의 비평집. 좋아하는 이와 있으면 도리어 그 좋아하는 마음이 다른 곳에 전이되는 걸까. 이영준이 좋아져 그 다음날 그의 책을 사 들었다. 그리고 틈틈이 책을 읽는다. '망막의 확장'에서 나는 책을 덮는다. 

 

버스를 타고 영풍문고로 향한다. 예전에 하려다 만 제본을 하나 하고, 오래 전의 글과 최근에 쓴 글 하나를 출력한다. 앞의 것은 단편소설 <꼭, 그렇게 웃어봐요>라는 글이다. 내 기억에 의한다면 대학교를 졸업하기 바로 직전에 쓴 것으로 기억. 다시 읽어보니 '웃음'과 '복기'와 '포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약자(弱者)들이 갖춰야 할 삶의 자세인 듯 했다. 다른 글 하나는 소설과는 다른, 미술작품에 관한 이야기였다. 짧지만 정성들여, 고민하되 편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그리고 영풍에서 나와 국현으로 걷는다. 나는 배가 고파져 국현 1층의 카페에서 크로와상을 하나 먹는다. 곧 친구와 만나 <게으른 구름> 展을 관람한다. 전시마당에는 눈에 띄는 모형이 공중에 떠 있다. 김순기 작가의 <게으른 구름>展에 관해서도, 전시마당에 있는 풍경에 관해서도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내게 이 전시는 흑과 백으로 나뉘어진다. 6관은 백색이고, 7관은 흑색이다. 6관에서 전시마당으로, 7관으로 발을 옮긴다. 친구의 말마따나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작업화'했고, 떠오른 단어는 prolific, 그 이후 김승옥의 단편소설 <다산성(多性)>이 언뜻 스쳐갔다. 

 

우리는 국현 교육동에 있는 1층 카페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나는 달빛걷기, 친구는 제주삼다영귤을 주문한다.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데미안에 대해서, 글에 대해서, 작품에 대해서. 그 외의 여러가지에 대해서. 우리는 나와 걷는다. 친구는 갤러리 현대로, 나는 집으로 간다. 둘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 아이들과 놀아주기 전, 피아노를 조금 연주하고, 아이들과 놀고 이네들을 재운다. 다시 찾아온 조용한 시간. 쇼팽의 녹턴을 돌려 듣고 글을 쓴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첫 부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져 마음이 아릿해진다. 더욱이 왜 '어려웠을까'로 과거형일까. 헤세는 그렇게 살았을까. 아니면 체념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저 표현은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어떤 안식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삶을 관조했을 때 드러나는 문체다. 나는 헤세와 내가, 그리고 친구가 각자의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 을 살았기를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김순기, <게으른 구름>展 6관에서 만난 작품.

중학교 시절,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언어'와 '공감'에 대한 문제가 불현 떠올랐다.

 

전시마당에 있는 <시간과 공간 2019>

 

예전에 나는 이 사진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그때 사진 속 나무는 초록이었다.

지금은 주황, 그만큼 시간은 흘렀다

 

겨울이 되면 이파리는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시간의 흐름이 선연한 색(色)으로 보여질 수 있다면

 

이파리는 떨어져 날아간 것이 아닌

투명이 되었다고.

 

나무를 보며 든 생각

나무는,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 걸까?

 

김순기, <게으른 구름>展 7관에서 만난 작품. 이런 광원(光源)들이!

 

마찬가지로 7관에서 만난 작품

콘크리트 벽돌위의 모형이

솟대와 모빌을 연상시킨다.

 

장난감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 

풍향, 풍속계가 떠오른다.

 

그것도 평화로운 날씨의 그것이 아닌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그것.

 

오래 전 보았던,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트위스터>에

나온 철제 풍향풍속계가 스쳐간다.

 

국현 교육동 1층 오설록에서

친구가 가져온 쿠키, 차(茶) 둘.

 

친구는 헤어질 즈음 아직 뜯지 않은 쿠키를

내 파일에 살며시 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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