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 책상 위의 조명을 켜고, 세안을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책상에 앉는다. 앉아서, 향을 피우고 쇼팽의 음악을 튼다. 비로소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 온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았는지도 모른다. 은은한 빛과, 은근한 향과,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고요한 음악. 곧 나는 책을 펼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구에 밑줄을 긋거나, 공책에 옮겨 적을 것이다.
한참동안을 그러다가, 이제 또 한편의 글을 쓸 것이다. 밤에 글을 쓰는 루틴. 이 글쓰기는 내게는 숙면을 보장한다. 무슨 글이여도 좋다. 쓰면 된다. 무엇이든지, 내 이야기가 아닌 것을 쓸 수는 없으니.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되짚어 본다.
오늘 향은 선정이다. 자단과 월백과 침향을 녹인 향이다.
오늘 책은 이영준의 <우주감각 NASA 57년의 이미지들>과 심보선의 <눈앞에 없는 사람>이다.
오늘의 음악은 늘 그렇듯, 쇼팽의 녹턴 <No. 15 In F Minor, Op. 55 No. 1>이다.
오늘의 연필은 오래 전, 포르투갈에서 만들어진 <Viarco> 연필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당신에게서 왔다.
그리고 그중 향과 책과 연필은 나무에게서 왔다. 나는 서로 다른 나무들 사이에 있다.
어떤 나무는 내게 지식을 전달하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어떤 나무는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내 몸을 휘감고 나간다.
어떤 나무는 내 흔적을 종이에 남기게 한다.
나무에서 오는 것. 그것은 내게 부단히도 온다.
나는 어쩌면, 나무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무. 하지만 나무가 움직이지 못하는 움직임은 이동이다, 나무는 끝없이 움직인다. 생장(生長)하지 않는가. 계절에 따라 제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향이 되고, 책이 되고, 연필이 된다.
나무에서 오는 것. 향과 책과 연필. 소중한 이들.
향을 태운다. <향을 태운다>는 곧 <향을 피운다>가 될 것이다.
향을, 향함에 놓는다.
향이 향함에서 나와, 공간에 은은히 스며든다
이영준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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